블로그 시작...

금요일 오후 5시 반...

칼퇴근을 제일의 속성으로 하는 시카고언들이 주말을 앞둔 오늘 같은 날에 회사에 늦게 남아 근무할 리가 없다. 오히려 평소 즐겨하는 '10분 먼저 퇴근'도 너무 잔인한 관습이라는 듯 정식퇴근시간 1시간 전부터 퇴근준비를 하느라 부산을 떤다. 이미 고객사 직원들의 반 이상은 휘몰아치는 바람과 낮은 각의 대각선을 그리며 휘내리는 눈 사이를 뚫고 평소보다 30분 정도는 먼저 시작된 러시아워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한참 뒤쳐진 일정을 필사적으로 따라잡고자 그나마 남아있는 직원들의 옷소매를 잡고 한맺힌 질문들을 던져보지만, 퇴근준비를 방해받은 그들이 진지하게 받아줄 리 없다.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 역력한 채로 억지로 친절한 목소리를 내가며 말한다.

"월요일에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한마디 하고 바로 외면해버리는 얼굴들을 뒤로 하고 내 자리에 와 앉는다. 우리 같이 저주받은 직업을 가진 자들만이 금요일 오후 5시 반에 일터에 앉아 고민을 한다.

'그냥 오늘 일찍 퇴근해 버려? 주말에 나와서 일하면 되잖아... 아니야, 그래도 주말에는 쉬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

그나마 이런 고민이라도 하면 다행이다. 금요일에 야근은 물론이요,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는 자들은 이런 고민도 포기한 채, 그리고 주변의 부산함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업무 속으로 빠져든다. 아니, 빠져든 척 한다. 안으로부터 긁어오는 속을 애써 달래가면서...


나 역시 금요일 밤에 저주받은 자들 중 한 명으로서 퇴근하면서 인사하는 고객사 직원들에게 건성으로 인사말을 건내며 앉아 있다. 얼핏 보기에는 달관한 듯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 상 하릴없이 이곳 저곳 웹사이트를 기웃거리며 웹서핑 중이다. 어차피 일찍 퇴근하기는 글렀고, 오늘도 별 맛을 모를 샌드위치 한 입 베어물며 외로운 야근작업을 해야겠기에 잠깐이라도 여유를 부릴 순간을 가져보고자, 그리고 그동안의 연일 야근으로 지친 심신도 좀 달래보고자 별다른 목적 없이 마우스 버튼을 클릭해대고 있다.

그러던 중, 예전에 우연히 들어가봤다가 나름 재미있는 글들이 마음에 들어 즐겨찾기에 등록해두었던 글곰님의 블로그를 다시 한번 찾게 된다. 그 사이 업데이트가 많이 돼 있지는 않았기에 예전에 읽었던 글들을 다시 읽어내려가며 미소를 머금던 중 (영화 '네이키드 웨폰'에 대한 리뷰는 최고였다.), 갑작스레 나도 한번 블로그를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물론 그전에 네이버 블로그질도 잠깐 해보았고 현재 싸이월드에 허접한 미니홈피도 한개 가지고는 있으나 글곰님의 블로그를 보면서, 그리고 이글루스의 간결하면서도 깔끔한 블로그 형태를 보면서, 이런 블로그라면 그동안 문득 문득 충동적으로 느꼈던 "기록"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 자리에서 회원가입하고 바로 블로그 개설에 들어간다. 그러나 역시 블로그질은 처음이 가장 힘들고 귀찮다. 블로그를 개설하자마자 스킨을 고르라니, 메뉴를 설정하라니, 로고를 만들으라니 등의 요구가 안내문 형식으로 압박을 해온다. 처음에 블로그 모양 만들고 예쁘게 꾸미려고 있는 힘 없는 힘 모두 쏟아붓고 나면 정작 글을 쓸 힘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 결국 글 하나 못 올리고 그대로 방치한 경험이 몇 번 있었기에 그냥 스킨 하나 대충 고르고, 로고로 쓸 사진 하나 올리고 바로 글쓰기에 들어간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탄생한다. 홍기맨, The Blogger. 이렇게 탄생한 내 초라한 블로그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당장 내일부터 방치되어 그대로 내 기억 속에서 잊혀져갈 지도 모르고, 몇 개의 허접한 글을 올리다가 인내의 부족으로 싫증을 느껴 짧은 수명을 마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뿌듯하다. 마치 새 집을 만든 듯 설레고 기쁘다. 서두르지는 않겠다. 다음 글을 언제 올릴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때 그때 갑자기 미친 듯이 뭔가를 적어놓고 싶을 때 주저없이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내 블로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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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기맨 | 2007/03/02 19:19 | Life & Live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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