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아름드리 풀꽃 따다
너의 품에 안기울 제
눈망울은
해거름
먼 산 너머서 넘어오는
너의 사랑 불길을 보며
내 마음은 시나브로
붉게 붉게
물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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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생 시절, 막역한 친구이자 글 쓰는 데 소질이 많았던 자운의 영향으로 꼴에 시를 쓴답시고 나름대로 습작을 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남들 시선 무서울 것도 없었고 감수성 풍부했던 시절이었기에 끊임없이 시상(?)이 떠올랐고 꽤 많은 시편을 써냈었다.

 대학교 진학 이후 매일 술에 절어 사느라 습작을 중단했던 것이 결국은 오늘날까지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세계가 돼버렸다. 그때까지 썼던 졸작들은 당시 국민 워드프로세서였던 아래한글 2.0으로 정성스럽게 타이핑하여 (그것도 멋을 낸답시고 궁서체로 편집했었지...) 5인치 디스켓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이후 내 책상서랍에서 굴러먹던 이 디스크는 노후화 돼서인지, 바이러스를 먹어서인지 더 이상 데이터를 읽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로 인하여 내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한 부분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 당시 시편들 중 유일하게 기억할 수 있는 시가 위의 '노을'이다.

 '노을'은 고등학교 자습시간 중 한샘 국어 참고서에 설명된 몇 개의 단어들 ("아름드리", "눈망울", "해거름", "시나브로" 등, 이 단어들은 한샘 참고서의 한 페이지 내에 모두 설명돼 있었다.)을 보면서 갑자기 생각나 쓴 것이다. 고달픈 수험생활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힘든 시간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휴식이자 해방의 수단이 됐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럽고 쓸 데 없는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꽤 진지했고, 무엇보다도 행복했었다. 당시 내가 써낸 시들이 수작인가 아닌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시를 쓴답시고 고민하고, 행과 연을 다듬고, 다시 고쳐쓰고 하던 그 자체가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자기만족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당시를 돌이켜보며 미소 지을 수 있다는 자체가 좋을 뿐이다.

by 홍기맨 | 2008/02/25 16:22 | 공상...? 망상...? 허상...?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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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포립 at 2008/02/29 17:14
과거를 생각하며 미소짓게 하는 것들.. 시도 있고, 사진도 있고, 친구도 있고..
정말 추억이란 좋은 것 같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며 아련한 그리움과 애틋함, 행복에 빠저본 건 저만이 아니었군요~ㅎ
Commented by 홍기맨 at 2008/03/01 13:57
포립님// 하찮은 물건, 노래, 그림, 글 등도 추억이 얽힌 것들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그 존재감이 한없이 커져버립니다.
가끔씩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추억에 젖어 있을 때가 있죠.
이런 순간들이 나름대로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준비하는 데 힘이 되고 활력소가 된답니다.
그런데 왜 지난날을 생각하면 가슴 한편에는 항상 애절함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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